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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동상 주변에서 서성거리다

 처칠 동상 주변에서 서성거리다
                              (이연실)

영국 국회 의사당 근처에 처칠 동상이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 영국 식민지 시절 단식 투쟁을 한 간디 동상도 있습니다. 역시 영국 지배를 받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아파르트 헤이트로 백인 정권에 맞섰던 넬슨 만델라의 동상도 있습니다. 간디나 넬슨 만델라의 동상을 영국에서 보는 건 뜻밖의 일입니다 윤봉길 의사나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도쿄에서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오묘해집니다.

처칠 동상 앞에서 식민지배를 벗어나 광복을 맞은 한국인의 감정이 꿈틀댑니다. 처칠은 자국의 이익을 위하거나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들이 지닌 패를 쉽게 뒤집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승리로 영국 자존심을 되찾으며 전 세계인들에게 V자 사인을 날렸습니다.

20세기 인류사에 처칠처럼 커다란 획을 그은 정치인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 영국인들이 가장 위대한 정치인 1위로 선정합니다.

처칠은 타고난 복이 많고 운도 좋았습니다. 와인을 하루에 1병씩 마셨으며 20대 청년 장교 시절에 쿠바에서 재미로 피워보았다가 푹 빠져버린 시가 애호가입니다. 평생 25만 개비 이상의 시가를 피웠습니다. 타고난 애주가이고 애연가이면서도 천수를 누렸습니다. 1965년 91세로 세상을 떠날 때 한국인들의 평균 수명이 60세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영국의 유명한 정치인 아버지와 미국인 은행가이자 뉴욕 타임즈 주주인 어머니 사이에서 팔삭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물에 빠져 죽기 직전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농부 아들 알렉산더 플레밍이 건져내 살아났습니다. 이튿날 으리으리한 마차를 타고 귀족이 플레밍의 집에 나타나 '내 아들을 구해줬으니 은혜를 갚겠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고 말하자 그 귀족은 '런던에 데려가 최상의 교육을 시켜주겠다'며 뜻밖의 선물을 제안합니다.

시골 출신 플레밍이 처칠의 아버지 덕분에 런던에서 세인트 메리 의과대학에 다녔습니다. 그가 훗날 페니실린을 개발해 세계 대전 중 수많은 병사들과 일반인들을 살린 것은 물론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처칠을 살려내었습니다. 처칠은 플레밍 덕분에 두 번씩이나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습니다. 플레밍은 차후 인류의 수명을 연장시킨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타게 됩니다. 어린 처칠을 살려낸 플레밍이 아니었으면 인류사도 한국의 운명도 크게 바뀌었을 겁니다 잘 짜여진 한 편의 드라마 같습니다.

처칠은 유머와 재치가 매우 뛰어났습니다. 대중을 휘어잡는 언변도 대단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탁월한 글 솜씨로 수많은 책을 펴냈고 제 2차 세계 대전 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습니다. 그는 영국 왕립 샌드 허스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장교였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보어 전쟁 때 종군기자로 활동합니다. 나폴레옹 전투와 제 1차 세계 대전 사이에서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오늘날 얼룩 무늬 개구리 군복이 그 전쟁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되었습니다.보어는 네덜란드어로 농민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숲이나 정글에 숨어들면 옷 색깔 때문에 영국 병사들이 식별을 못해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오늘날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그 당시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식민지배를 하며 포도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곳에 금광이나 다이아몬드 광산이 개발되자 영국이 50만 명 되는 군대를 동원해 강탈하려 한 것이 보어 전쟁입니다. 네덜란드계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7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군대로 격렬하게 영국군에 저항했습니다. 그들은 게릴라 작전으로 영국이 쉽게 제압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처칠은 당시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 480Km 먼 영국으로 걸어서 돌아가 국민적인 영웅 대접을 받으며 왕실로부터 최고 훈장을 받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진주만 공격을 당하자마자 처칠은 미국을 움직여 영국과 프랑스를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앙숙이었습니다. 백년전쟁 등 수많은 싸움이 일어났고 오랜 세월 결코 서로 용서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독일 제국이 유럽 대부분을 장악하자 함께 손을 잡았던 겁니다.
그 일처럼 절박했던 처칠은 3개월간 백악관에 머물며 시가를 너무 피워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인 영부인의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미국의 조력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일본이 아시아권을 폭넓게 식민지로 삼자 처칠은 러시아와도 손을 잡습니다. 러시아가 일본을 치도록 비밀 회의도 했습니다. 일본이 원자폭탄 때문에 항복을 했으니 다행이지 피의 바다를 몰고 다닌 스탈린에 의해 일본을 공격할 시나리오대로 진행되었다면 한반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처칠 총리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당시 중국 총통인 장제스와 회담을 했습니다.  '일본의 노예 상태에 놓인 한반도를 적절한 시기에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결의했습니다. 카이로 회담에 이어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이 주도한 우크라이나 땅 얄타에서 한국의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한국인은 일본의 식민지로 지냈으니 스스로 나라를 건사할 능력이 없으므로 40년간 신탁 통치를 해야 한다'고 그들이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이익에 의해 한반도가 절반으로 나눠졌고 그 고통은 현재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이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라는 사실도 뼈아픈 현실입니다. 한반도 사드 배치로 엄청난 논란이 이는 것도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오산 미군기지에 도착한 것도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위험한 나라로 인식돼 여행 가기를 두려워합니다. 막상 한국에 와보면 자신들이 상상했던 나라가 아니어서 놀라워합니다. 분단이라는 역사의 회오리 속에 처칠이 담겨 있습니다.

처칠은 영웅입니다. 자신들의 나라 심장부이자 세계의 중심이라 여겼던 런던 하늘에 독일 전투기가 날아와 융단폭격을 할 때 영국인들은 방공호에 숨어 들어가야 하는 수모를 겪으며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처칠은 수상 취임 연설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모든 인생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피와 눈물과 땀을 바치겠다'고 절망에 빠진 영국인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런 처칠에게는 다른 면도 있습니다. 간디가 단식 투쟁을 할 때 처칠은 '그 인간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식민지 사람들이 저항하면 식량뿐 아니라 씨앗까지 몰수해 수백만 명을 굶어죽게 했습니다. 영국 정치인들조차 그런 처절한 비극 앞에 '처칠이 제 정신이 아니다'라고 심각하게 우려할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인도 땅에서 수백만 명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유대인처럼 뼈만 남아 거리에서 죽었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집무실에 처칠 흉상을 놓았습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놓아둔 킹 목사의 흉상을 보란 듯이 다른 위치로 옮겼습니다. 그가 처칠 흉상으로 바꾼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정치 공학적인 제스처로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더 들춰보면 자신의 내면 모습이 숨겨져 있어 보입니다.

트럼프는 억만장자이면서 세계 최강의 나라 미국  대통령이지만 처칠과 같은 영국계 귀족은 될 수 없습니다 처칠이 가진 수많은 역사적인 기록을 깰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런 부러움이 독일계 이민자의 후손일 수 밖에 없는 트럼프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처칠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찾아가 간절히 도움을 청했던 미국 땅에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지구촌을 향해 높은 장벽을 세우고 있는 한 이민자의 후손이 그를 부러워하는 모습은 멋적은 아이러니입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너무나 많은 걸 누리고 지구촌의 미래를 쥐락펴락 했던 정치인이자 '정치란 무릇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 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정치 9단 처칠, 그가 살아있다면 자신의 조국인 영국이 나부터 살고 보자며 택한 브렉시트나 미국의 극단적인 우선주의와 혼란에 빠져서 조기 대선을 앞두고 있는 한국에 어떤 훈수를 둘까요?

처칠 동상 앞에 그의 행적이 비쳐져 있습니다.
스쳐가다가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또 있겠지요.
그 앞에서 햇볕을 쬐고 대화를 나누며 사진을 찍겠지요. 엄청난 역사를 품은 동상과 근처의 광장과 하늘 배경이 때로는 쓸쓸해 보이기도 하겠지요.
모든 역사라는 것도 때로 그렇듯이 말입니다.

 

권오석  bims11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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