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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화형 인간, 환원형 인간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 밤 문득 드릴 말 있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 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나 그대에게 드릴 게 있네. 오늘 밤 문득 드릴 게 있네.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 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가수 이장희님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대여섯 살쯤 되는 계집아이가 엄마의 화장품을 꺼내서 이것저것 만지다가 립스틱이 입가에 빨갛게 번진 얼굴로 엄마를 향해 계면쩍게 웃고 있다. 이 앙증맞은 모습을 어린아이를 돌보거나 키워본 사람이라면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텅 빈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뭔가 ‘채우기’를 시작하게 된다는 걸 입증해준다.
 
 ‘채우기’는 세상살이에 눈뜨면서 차츰 소유란 형태로 발전한다. 소유하려는 욕망은 집착을 낳고 집착하면 더욱 탐닉하게 된다. 탐닉이란 일이 뜻대로 안되거나 욕구불만이 있을 때 그 핑계로 엉뚱한 돌파구를 찾는 경우 더 강한 목표가 생기기까지는 멈추지 않는 욕망이기도 하다. 또한 마약과 같아서 한 번 그 늪에 빠지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큰 충격을 받지 않고는 빠져나오기 어려운 블랙홀이다.
 
 
 이렇게 인간이 빠지기 쉬운 소유나 집착의 개념을 살펴볼 때, 적잖은 사람들이 성향이나 기호에 따라 각자 ‘유혹에 특별히 약한 부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승세를 타는 곳에 최신식 아파트나 새로 나온 자동차에 열광하는 사람, 명품가방에 홀리는 소위 된장녀, 가구나 그릇 마니아, 첨단기기가 출시되기가 무섭게 제일 먼저 구입하는 사람, 동네 산보를 하면서 히말라야 등반대처럼 무장하는 사람 등 주로 어느 쪽에 소비하는 지를 보면 무엇에 애착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무엇이든 욕심껏 소유하다 보면 관리가 벅차니까 결국은 덜어내야 하는 시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은 컴퓨터에 자료가 많으면 과부하로 인하여 성능이 떨어지므로 불필요한 것은 삭제하고 휴지통 비우기를 하며, 과식을 하면 머리가 아프고 속이 더부룩해져서 화장실을 찾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화장실을 ‘근심 푸는 곳(解憂所), 몸무게 줄이는 곳’이라고 한 선인들의 재치가 돋보인다.
 
 우리 삶 가운데 채우기와 비우기는 산화와 환원의 개념으로도 대입할 수 있다. 즉, 생물의 체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원리가 ‘산화와 환원’이다. 산화란 물질(세포, 유전자, DNA)과 산소가 결합하는 것이며, 환원이란 물질과 산소가 분리하는 것을 일컫는다. 우리 몸의 피부나 간장 또는 췌장의 세포에 산소가 결합하면 부식되기 쉽다. 이런 상태에서 산소를 떼어 내면 세포는 원래의 싱싱함과 건강을 되찾게 된다.
 
 인간의 역사와 그를 둘러싼 우주현상은 통합과 분열을 반복해 나가는 과정인 것처럼, 소멸되고 악화되어 가는 ‘산화’와 소생하고 회복되는 ‘환원’의 순환현상도 계속된다. 어린아이 때는 호기심과 욕구충족 통하여 인생을 배우고, 성장하면서 다채로운 분야의 사회활동을 하다가 인생의 황혼이 깊어지면 삶의 일상이 단순화되고 통합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채우기와 비우기, 즉 산화와 환원의 순환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사람은 대개 나이가 들수록 세속의 먼지가 끼고 상처를 입게 되면서 감성이 메마르고 무뎌지게 된다. 따라서 삶에 흥미와 열정이 식고 권태와 무기력에 젖어 때로는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산화가 상당부분 진행된 성인들은 대체로 현실상황에 쫓기어 채우기에만 급급하고 적절한 시기에 비우기를 못하여 체내에 산화되고 누적된 유해독소로 인하여 괴로움을 겪게 된다. 그러면 항산화기능을 가진 영양제나 식품을 찾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반면 젊은 날의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 내적성숙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나이가 먹어도 진정 ‘소년의 무지개’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산화가 되지 않은 사람, 소위 ‘알칼리성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어느 시점까지는 채우기에 급급했다면 ‘물질의 부자’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의 부자’가 되기 위해 정갈하고 풍요한 내면을 가꾸고 베풀음을 통한 내적인 충만을 체득해야 한다.
 또한 조화로운 인생을 위해서는 욕심에 대한 균형감각을 가지고 채워지는 만큼 비우기도 해야 한다. 채우기(산화)에 중독되어 세상적인 욕망과 집착이 유난히 많은 사람에게는 그 삶의 복잡하고 번다함에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반면 비우기(환원)를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상큼함과 단아한 인격이 내뿜는 향기가 있다.
 
 그런데 어느 정치인이 유행시켰던 말처럼 겉으로는 ‘마음을 비웠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는 표리부동한 사람은 악취를 감추기 위해 진한 향수를 뿌린 것처럼 미화된 욕망에 대한 메스꺼움을 느끼게 할 뿐이다. 내용은 부패하였는데 무늬만 아름다운 포장이나 자기합리화는 ‘땅속에서도 잘 썩지 않아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검정비닐’과 같이 비우기와 는 먼 개념이다.
 그런가하면 부족하고 창피하더라도 진솔하고 겸허하게 자신을 드러낼 줄 알면 오히려 ‘모습은 달라도 결국 사는 건 비슷비슷해.’ 라고 하면서 수긍하고 포용하게 된다. 그러기에 꾸밈없이 사는 습관을 가져야 자연스럽게 비우기를 실천할 수 있다.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며 마음을 비우겠다.’고 산이나 바다로 간다. 그러나 몸속은 기름진 음식으로 가득 채우고 비워야할 마음 대신 소주병만 비우고 또다시 산화가 되어 돌아온다. 이는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단번의 비장한 각오로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부단한 자기성찰과 수련을 통하여 서서히 실천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제는 무엇에 대한 애착과 자기애(自己愛)로부터 벗어나 주변을 바라보라. 탐욕으로 일그러지지 않은 담백한 삶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나보다 어둡고 상처받은 이웃이 보이면서 자신의 지칠 줄 모르던 욕망이 부끄러워지면서 차츰 ‘내 것을 덜어서 남의 것을 보태는’ 선행의 즐거움도 알게 된다.
 
 인간의 욕망은 제동이 걸릴 때까지는 무한궤도를 달리는 속성이 있으므로 환원 즉, 욕심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를 늘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 한없이 욕망을 쫓다가 마침내 쇠고랑을 찰 때까지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은 산화형 인간이다.
 반면 평생을 통해 무소유를 실천한 법정스님,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초인적인 박애와 봉사의 삶을 산 장기려 박사와 아프리카 수단에서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의 등불이 되고 사랑의 불씨를 퍼트려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미션을 주고 간 이태석 신부는 종교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다. 이분들이 이 세상에 모든 걸 돌려주고 간 대표적인 환원형 인간이다.
 
 우리는 산화형 인간이 될 것인지, 환원형으로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라 행복의 가치기준도 달라진다. 요즘 많은 예술인과 의료인들은 소외된 이웃과의 나눔행사에 적극 동참한다. 끊임없이 채워서 산화형으로 사는 게 불변의 행복이라면, 그들은 여전히 영광과 환희에 취할지언정 이웃의 아픔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내 것을 타인과 나눌 수 있는 용기, 나 하나라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는 확신, 그것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가수 이장희님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환원형 인간을 떠올리게 하는 참 아름답고 고귀한 가락이다.♧ 


이수영  visionlks@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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