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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르는 계절

지구온난화로 대기의 평균온도가 높아지면서
한국은 벌써부터 아열대기후 현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여름이 더 길어지고 무더위도 훨씬 독해졌다.
일 년의 1/3이 넘는 이 여름을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즘 한창 휴가철이다. 여름철이 되면 사람들은 산과 바다로 그리고 해외로 나간다. 도대체 세상 사람들 의식 속에 집 밖으로 나가야만 휴가라는 관념이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그건 아마도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8.15해방과 6.25전쟁을 치룬 후 경제발전을 이루고 웬만큼 먹고살만해지면서 부터가 아닐까 싶다. 휴가는 일종의 문화이고 의식주라는 기본욕구가 해결된 다음의 상위욕구이므로.
 
 그렇다면 한국인의 휴가풍경은 어떠한가. 조용하고 서늘한 계곡에 텐트를 치고 그늘에 앉아 고기를 구워 먹고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은 비교적 소박하고 한적함을 좋아하는 부류이다. 한편, 비키니가 어울리는 몸매에 선글라스를 쓰고 선탠크림을 바르는 여성과 그 옆에 누워 일광욕을 하는 근육질 남성은 해마다 이맘때면 등장하는 해수욕장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그리고 공항에 가면 유행하는 공항패션에 캐리어 가방을 끌며 출입국수속장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며 하품을 하는 해외여행자 행렬로 만원이다.
 
 사교육에도 빈부차가 있듯 휴가에도 일부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격차가 있다. 전혀 휴가 갈 엄두도 못 낼 형편에 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시아 인근지역은 비교적 경비가 싸니까 한국 사람들이 많아 외국이 아니고 제주도쯤 온 느낌이라고 먼 나라를 고루 다니는 ‘여행마니아’도 있다.
 하긴, ‘제주도쯤’이라고 하는 동남아국가들은 한국인이 즐겨 찾는 곳이라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국음식점, 한국노래방, 한국인 슈퍼 등에서 한국말을 하며 굳이 한국산 맥주까지 찾는 이도 있다. 남의 나라에 가면 고국에 대한 향수나 애국심 비슷한 감회가 생기는 모양이다.
 
 
 언제부터인가 해마다 늘어만 가는 해외여행도 일종의 경제력의 척도로 여기는 풍조가 생긴 것 같다고 혹자는 말한다. ‘이웃집 아무개가 가니까 나도 빠질 수 없지!’ 라고 하며 해외여행자 대열에 속하지 않으면 마치 낙오자인양 불안해지는 일종의 ‘중산층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들을 해외로 내몰고 적잖은 외화를 쓰게 한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에는 ‘대도시에 32평 아파트와 중형자동차 그리고 일주일에 1회 정도는 외식을 즐길 수 있어야 국민들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는 어느 리서치 회사의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었다. 요즘 기준으로 본다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능력이 중산층의 척도에 포함되는 걸까?
 물론 국민의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소비패턴은 변하였고 경기불황과는 무관하게 매년 해외여행자가 증가하는 것은 국민의 문화생활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는 지표라고도 볼 수 있다.
 게다가 ‘좋은 음식을 찾는 사람이 미식가가 되듯이, 해외여행의 묘미를 안 사람들은 국내여행지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도 한다. 그래서 심하게는 ‘해외여행도 일종의 중독’이라고 폄하(貶下)하는 사람도 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에는 땅과 집을 사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시시각각으로 지구촌 소식을 접하고 산다. 그런 정보화 세대는 ‘후대를 위해 부동자산을 소유하고 애착을 갖는 것보다 당대에 즐기면서 여유롭게 살자.’ 라는 서구식 가치관을 습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여행객이 증가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해외로 떠나는 여름휴가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우선 신체 건강하고 경제적 여유가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해외여행은 아직도 그림의 떡이고 자칫 상대적 빈곤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일부분의 선호도를 객관적인 기준인 양 설정하고 유행처럼 따르는 휴가보다는 선현들처럼 ‘자기만의 쉬는 법’을 익히면 좋을 것 같다.
 
 
 200년 전에 유배지에서 왕성한 독서와 집필활동 그리고 후학양성에 힘쓴 정약용 선생에게는 시원한 아름드리 나무그늘과 아낙네들이 만들어준 소찬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으리라.
 몇 년 전 작고한 어느 정치인은 감방에 몇 년간 들어갔다 오면 고독의 깊이만큼 독서에 몰두하여 출감할 때는 어느덧 한 분야의 박사가 되어 있더라고 한다. 그에게 감방은 최고의 공부방이 된 셈이다. 
 불의와 부조리가 난무한다고 도피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푸시킨의 말처럼 ‘세상이 나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고 꿋꿋이 나의 길을 가련다.’고 하면서 시류(時流)에 무관하게 지내는 이분들은 후세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아직도 대지가 이글거리는 폭염이 한창이다. 그러나 무더위를 피한다고 어디론가 떠나도 정체되는 도로 사정, 수많은 인파로 인해 시원하기는커녕 태양열, 지열과 사람들의 열기가 더해지면서 지치는 표정의 휴가객들은 도착지에서의 ‘짧은 즐거움’을 위하여 고속도로와 공항에서의 ‘긴 피로’를 감수해야한다.
 
 그래서 여름휴가에도 블루오션을 적용하면 좋을 것 같다. 삼복더위에 사람들이 휴가여행 떠나고 텅 빈 동네는 고요하다. 적막함은 성찰하기 알맞고 평소에 살피지 못한 것을 돌아보는데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전원의 향기를 물씬 맡을 수 있는 곳이나 냉방이 잘 된 집안에 틀어박혀 정신을 살찌우는 일을 찾고 여름과 사이좋게 지내보자.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추억의 한 장면이 있다. 널찍한 마당에 깔아놓은 시원한 밀대돗자리에 누워 옥수수와 찐 감자를 먹고 별자리를 헤아리던 어릴 적 여름밤의 풍경이 새록새록 그리울 것이다.      땡볕 속에서도 간간히 청신한 바람이 부는 날, 냇물에 풍덩 들어가 놀다가 원두막이나 나무그늘 평상에 누워 즐기는 오수는 꿀맛이다. 정겨운 풀벌레 노래와 시냇물 소리가 유난히 청아하게 들리는 한여름 밤의 정취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충분히 위안을 줄 수 있다.
 
 
  또한 여름에는 봄의 싱그러움과 찬란함에 취하여 들뜨고 뒤숭숭해지거나, 가을의 우수와 허무감의 나락에서 허우적대지 않아도 된다. 오로지 더위와 싸우느라 미세한 감성은 잠재울 수 있어 어딘가에 푹 파묻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기 좋은 계절이다. 어디서든 솔솔바람만 좀 불어준다면 공부나 독서 그리고 영화도 맘껏 탐닉하면서 창조적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다. 이렇듯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본다면 여름은 고맙고 아름다운 계절이다. 
 
 요즘 방송매체에 신개념의 휴가로 등장하고 있는 조부모와 손자가 함께 전원향기 가득한 고향집으로의 휴가나 청소년들의 팜스테이, 농촌봉사, 농사체험도 자연과의 친화를 통하여 소박한 정서를 함양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세대 간의 교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지구온난화로 모두가 감당해야 될 긴 무더위의 계절인 여름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어디론가 떠난다. 그러나 이젠 떠나는 여름보다는 ‘개구리가 더 멀리 뛰기 위해 전략을 구상하며 잠시 웅크리듯’ 머무르고 칩거하는 계절로서의 여름을 생각해보자. 고요히 침잠(沈潛)하는 공간은 현재의 삶에 활력과 윤기를 더하고 풍요로운 미래를 구상하기 위한 아이디어의 산실(産室)이 될 것이다.♧


이수영  visionlks@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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